2005년 겨울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몇 겹의 눈으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를 들여다본 그 시절의 이야기다. 학생회의 간부로 있는 작중화자 ‘나’는 9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마치 다큐멘터리라도 감상하듯 한 발짝 물러나 있다. 김지하의 글과 박홍의 기자회견으로 시작된 90년대의 혼란은 유서대필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정원식 총리를 향한 계란과 밀가루 투척사건으로 완결되었다. 그러나 그건 역사가 자신의 논리를 위해 수많은 진실을 버리고 취사선택한 공동체의 기억에 불과하다. 김연수는 역사적 기록들의 틈새에 처박힌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다양한 현대사 속에 휩쓸리듯 살아간 개인들의 삶이 한국과 독일에 걸쳐 서로 엇갈리고, 만나 인연을 이룬다. 삶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사회와 개인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김연수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 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의 일]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이 있다.
학생들이 죽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건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떠들어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손을 흔들어가며 외쳤다.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필연적인 결과에 비하면 내가 살아남은 건 너무나 우연에 가까웠다. 그 죽음이 필연이라고 떠들어대면 떠들어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우연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가장 먼저 삶과 죽음이 서로 그 자리를 바꿨고, 그 다음에는 정의와 불의가, 진실과 거짓이, 꿈과 현실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실낱같지만 확실한 무엇
그리고 大腦와 性器 사이에
라디오의 나날들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으니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남았어
내게 조국은 하나뿐입니다, 선생님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
지옥불 속에서도 붐붐할 수 있는
건포도 폭격기와 낙타의 역설
비둘기도 바다 건너 산을 건너서
門 열어라 꽃아, 門 열어라 꽃아
그리고 그의 이름은 헬무트 베르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베를린, 레이, 십 그램의 마리화나
뒷산에서 놀러 내려왔던 원숭이 바쿠도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그러면 존재하는 현실은 무너지리라
커다랗고 하얗고 넓은 침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