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력이 80분간만 지속되는 천재 수학자와 미혼모 파출부인 '나', 그리고 '나'의 아들 루트가 함께 한 1년의 이야기이다. '나'와 루트는 천재 수학자로부터 수식의 아름다움을 배워나가면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체험하고 가족과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수학자가 설명하는 수식의 세계와 80분간만 지속되는 기억이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오가와 요코 小川洋子
1962년 오카야마 시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문예과를 졸업한 오가와 요코는 『상처 입은 호랑나비』로 1988년 가이엔 신인문학상을 거머쥐며 일본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독자와 평론가들로부터 꾸준히 사랑 받아온 그녀는 1991년 『임신 캘린더』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2003년에는『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제55회 요미우리 문학상 소설상, 제1회 서점대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일본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 자리 잡았다.
"어디, 1에서 100 사이에 있는 소수를 써볼까."
연습 문제를 풀고 나자 박사는 루트의 연필을 쥐고 숫자를 죽 써 나갔다.
2,3,5,7,11,13,17,19,23,29,31,27,41,43,47,53,59,61,67,71,73,39,83,39,97
언제 어떤 경우에든 박사의 손가락에서는 숫자가 술술 나왔다. 내게는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전자레인지의 스위치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늙고 왜소한 손가락이 어떻게 무수한 종류의 숫자들은 이토록 정연하게 통솔할 수 있는지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동시에 나는 박사가 4B 연필로 쓰는 숫자의 모양을 좋아했다. 4는 너무 동글동글해서 리본의 매듭 같고, 5는 앞으로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고,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멋이 있었다. 박사가 태어나 처음 숫자를 만난 이후 애지중지 키워온 정이 각각의 모양에 반영돼 있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니?"
박사는 늘 추상적인 질문으로 말문을 텄다.
"다들 제멋대로예요."
대개는 루트가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2만 짝수고요."
루트는 소외된 수를 유독 잘 찾아냈다.
"그렇지. 소수 중에서 짝수는 2, 딱 하나뿐이다. 소수 번호 1의 1번 타자, 리드오프맨은 혼자 선두에 서서 무한한 소수를 이끌고 있는 것이란다."
"외롭지 않을까요?"
"아니, 걱정할 것 없다. 외로워지면, 잠시 소수의 세계를 떠나 짝수의 세계에 가면 친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17과 19, 41과 43처럼, 이어지는 홀수가 둘 다 소수인 경우도 있네요."
나도 루트에게 지지 않으려고 분발했다.
"음, 아주 좋은 지적이야. 바로 쌍둥이 소수지."
평소 사용하는 언어가 수항에 등장하는 순간 낭만적인 울림을 띠는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애수도 그렇고 쌍둥이 소수도 그렇고, 적확함은 물론 시의 한 구절에서 빠져나온 듯한 수줍음이 느껴진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 속에서 숫자들이 서로 포옹하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차려입고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기도 한다. ---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