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셀 투르니에 저/ 민음사 / 2009년 / 309쪽 / 9,000원
  전직원
  중
  로빈슨 크루소, 문명세계, 자연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 미셀 투르니에 장편소설이다. 18세기 고전으로 꼽히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저자가 뒤집어서 다시 해석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원주민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과 인간 문명의 한계, 인간의 생존 바탕인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할 수 있다.
미셀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1924년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느와 독일 튀빙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철학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교수자격시험에 실패한 후 번역과 방송국에서의 일을 하다가 출판사인 플롱사에서 문학부장직을 10년 동안 맡았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7년 첫 소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했고, 1970년 『마왕』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첫 번째 작품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면, 이 두 번째 작품은 괴테의 유명한 발라드 「마왕」과 「요정들의 왕」이라는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마왕』은 『양철북』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전쟁 문학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셸 투르니에 최고의 환상 소설이다.
"글을 쓴다는 이 성스러운 행위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갑자기 지금까지 빠져 있었던 동물성의 심연으로부터 반쯤 헤어 나와 정신세계로 진입한 느낌이었다."(56쪽)
"일체의 생산은 창조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다. 일체의 소비는 파괴이며 따라서 나쁜 것이다." (75쪽)
"섬은 곡식과 채소 밭으로 뒤덮였고, 논에서는 첫 번째 수확이 나올 참이었으며, 우리 안에서는 가축으로 길들인 염소 떼가 소동을 피웠고, 동굴 안에는 한 마을 전체 주민들을 여러 해 동안 먹여 살리기에 충분할 만큼 저장된 곡식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이토록 훌륭하게 이루어놓은 성과의 내용이 필경 공허해지고 말 것임을 로빈슨은 느낄 수 있었다." (171쪽)


로빈슨의 주의를 끈 것은 그 좁은 공간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발견한, 깊이가 약 5피트는 되어 보이는 오목한 구멍이었다. 그 안쪽은 아주 반들반들하면서도 매우 복잡한 모양을 찍어내는 데 쓰도록 된 무슨 거푸집 속처럼 이상한 모양의 기복이 생겨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도 그렇지 않나 짐작은 했었지만, 다름 아닌 자신의 몸 모양이었다. 여러 번 맞추어 시험을 해보고 나서 그는 마침내 몸이 놓였던 자세―무릎을 세워 그 위에 턱을 고이고, 두 발목을 서로 엇갈리게 한 다음 두 손을 발 위에 올려놓은 채 몸을 웅크린―를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런 자세를 취하자 몸이 그 구멍 속에 어찌나 꼭 맞는지 그 속에 들어앉자마자 자기 몸의 한계가 어딘지를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는 영원한 행복 속에 정지되어 있었다. (…) 이 정도의 깊이에 이르면 스페란차의 여성적 본질에 모성(母性)의 모든 속성들이 축적되는 모양이었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미약해지면서 로빈슨은 어느 때보다도 더 그의 어린 시절의 잠든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영상에 마음을 빼앗겼다. (…) 자기 어머니의 품에 자신이 안겨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pp. 129~131.